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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나는 누구인가?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199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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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나는 누구인가?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1999>

참잘했을까요? 2020. 10. 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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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반적인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처 : 다음 영화

 

 저 기괴한 포스터때문에 언제나 망설여졌던 <존 말코비치 되기>. 90년대의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한껏 뽐내는 듯한 포스터에 끌려 다시 보게 되었다. 90년대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90년대는 고도성장기로 풍요가 가득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면에 무엇이 있었길래 이 당시의 영화들은 모두 인간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걸까. 아니면 풍요롭기에 예술이 흥할 수 있었던 걸까.

 인간에 대한 고찰이 사라질 수록 실은 우리는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는지도. (통계적으로는 세계 빈곤율이 가장 낮은 것이 지금이라는 점이 아이러니. 우리는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스틸컷

 

 볼품없는 인형술사 크레이그가 15분 동안 유명배우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 통로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작 초반 인물들은 모두 괴상한 말을 해대며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일단 7과 1/2 층에 존재하는 좁은 사무실부터 시작해서 동물들로 가득한 크레이그의 집. 부스스한 머리에 원숭이에 집착하는 크레이그의 아내 라티. 크레이그와 라티가 성적으로 욕망하는 크레이그의 사무실 동료이자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 통로를 판매하는 맥신.

 

출처 : 다음 영화 스틸컷

 

 존 말코비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수없이 늘어났고 대부분의 경험자들은 너무나 기쁜 경험이었다고 환호를 지른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지만, 삶이 바뀔 정도로 행복한 경험인가? 심지어 라티는 이제야 나를 알겠다며 자기는 남자이며 맥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말코비치가 되어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부러운 다른 누군가가 15분간 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나는 그 통로를 사용하고 싶을까?

 글쎄. 다른 누군가가 부러운 적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내가 아닌 그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갸우뚱할 것같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서운 일이지 않은가. 작중 존 말코비치로 유명한 인형술사가 된 크레이그의 인형술은 크레이그의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인형술사로 인정받는 것은 존 말코비치이다. 그렇다면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인가? 말코비치는 크레이그인가? 

 우리는 모두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나를 부정당할 때 가장 크게 분노한다. 오히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러한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의미에서 크레이그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인물은 아니었던 셈이다. 말코비치로 살며 누구보다 행복해하였으니 말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는 삶이란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렇기에 크레이그는 영원히 아이의 몸에 갇혀 수동적으로 맥신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출처 : 다음 영화 스틸컷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맥신과 라티는 서로 사랑하지만 맥신은 말코비치가 된 라티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명확히 말하면 욕정하는 것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맥신은 아주 세속적인 인물이었기에 라티를 사랑하지만 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말코비치의 육체와 돈, 명예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렇게 경멸하던 말코비치(=크레이그)와 살며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머리도 기르고 크레이그처럼 변해가는 말코비치와 행복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세속적인 맥신이라 하더라도 진짜 사랑했던 것은 라티였던 셈.

 라티의 경우 자신 그대로 사랑받지 못해도 맹목적으로 맥신을 사랑하는 모습은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삶을 욕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헷갈렸다. 맥신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 갇힌 것뿐으로 보여졌다. 그렇기에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다고 총을 들고 맥신을 죽이려하였겠지. 

 맥신은 말코비치가 된 라티와 만든 아이니 이 아이는 너와 나의 아이라고 한다. 그렇담 그 때의 말코비치는 라티인가? 하지만 맥신은 말코비치가 된 크레이그와 라티를 구분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럼 말코비치의 아이는 아닌건가? 이 안에서 말코비치는 도대체 어느 지점 즈음에 존재하는 인물인가.

 영화를 보다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들고 아이고 두야, 싶은 상황들도 많아지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게 된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정신적인 면이 나를 명명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의 육체 또한 하나의 나인 셈이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연애를 할때면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곤 하는데 언제나 이러한 조건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된다. 조건은 무엇인가. 나를 정의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나를 정의하지 않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그동안은 타인이 정의하는 조건들을 제외한 것들이 나를 정의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결국 타인이 명명하는 것이 결국 진짜 나인것 처럼 보인다. 맥신이 그 때의 말코비치가 라티였다고 명명하는 순간 이 아이는 라티의 아이가 되었던 것처럼. 

 

출처 : 다음 영화 스틸컷

나로써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 

 하지만, 이 세 인물이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세 인물 모두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말코비치의 삶을 사랑하는 크레이그. 말코비치로서 맹목적으로 맥신을 욕망하는 라티. 그리고 말코비치의 육체를 사랑하는 맥신.

 세 사람은 모두 말코비치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코비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영하는 인물들. 하지만 결국 라티와 맥신은 서로를 진실로 마주볼 수 있게 되었기에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었다. 끝까지 말코비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크레이그는 아이의 몸에 갇히고 말았다.

 

 타인이 명명해주는 나는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결국 다른 이에게 종속될 뿐이다. 말코비치 속의 사람들은 말코비치를 조종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말코비치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영화 중간 <왜 이렇게 나이든 몸을 고른거야?> 라고 투덜거리는 크레이그처럼 말코비치의 몸으로 옮겨다니며 영생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음 사람을 찾아나선다. 이번엔 에밀리야, 라고 말하며 방 한구석을 에밀리의 삶으로 가득 채운 장면은 소름이 돋는다. 이 사람들은 사실 영생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진짜 자기 자신은 벌써 죽었으니까. 말코비치 속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죽어있는 셈이다.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는 것같다.

 물론!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생각일뿐이다. 영화는 사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일 뿐. 이건 오롯이 소중한 내 생각이다. 수많은 타인과 상황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생긴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것 또한 나의 경험이고 나의 것이니 이는 내 것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기쁘고 벅찬 느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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