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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생각] 인생의 베일 - 서머싯 몸, 민음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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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생각] 인생의 베일 - 서머싯 몸, 민음사

참잘했을까요? 2021. 11. 1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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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 없인 못살아요. 이런 내가 가엾지도 않아요?


그는 당신이 허영심이 많고 비겁하고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당신이 당신 자신밖에 사랑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자신의 화를 면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나를 희생시킬 인간이라는 걸 그 사람은 알고 있었어.


찰스가 멍청하고 허영심이 많으며 칭찬에 목말라한다는 것은 그녀가 봐도 분명했고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기 위해 일화들을 늘어놓을 때 번뜩였던 자기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녀를 아신다면 그런 분별 없는 질문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당신에게 경외감을 심어 주었다면 그녀는 분명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겠지요.


종교인들은 언제나 근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귀엽고 천진하고 명랑하다니 키티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단순하고 순수했지만 타고난 위엄으로 경외감을 자아내서 그녀를 존경심없이 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불복종이란 것이 가능하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의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위대한 여성의 겸손함과 성인의 겸양을 갖추었다.


설명하기 힘드네요. 오늘 수녀원에 갔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곳의 모든 일들이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너무나 끔찍했고 수녀들의 자기 희생이 너무나 경이로워요. 어리석은 여자가 당신에게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당신이 괴로워한다는 건, 당신이 내 말을 이해해 주면 좋으련만, 부질없다는 생각, 쓸데없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드는걸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내 생각을 하기엔 난 너무나 무가치하고 하찮아요.


알겠지만, 평화는 일이나 쾌락, 이 세상이나 수녀원이 아닌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답니다.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아. 아, 이 평안과 자유스러움이여! 돌이켜 보니 이상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그를 열망했다니. 그런데 지금 그녀가 웃고 있다. 스스로를 무가치한 바보로 만들다니! 이제 와서 차분히 그를 평가해 보니 그에게서 무얼 보았던 것인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자유, 자유, 마침내 자유였다! 그녀는 큰 소리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에서 사물의 무상함과 애수가 밀려왔다. 모든 것이 흘러갔지만 그것들이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그러기엔 너무 바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놀라운 사람들이고 너무나 친절해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해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마치 그들끼리는 비밀 하나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삶에 모든 변화를 가져오지만 난 그것을 공유할 가치가 없는 존재같아요. 신앙은 아니에요. 더 깊고 더. 더 중대한 뭔가예요. 그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을 걷고 있어서 우린 항상 그들에게 이방인이죠.

사실 당신이 옳아요. 내가 여기 남으려는 건 고아들 때문만은 아니죠. 알다시피, 난 이 세상에 찾아가 의탁할 만한 영혼은 단 하나도 없는 특수한 입장에 처해 있어요. 날 귀찮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내겐 없어요. 내가 죽었든 살았든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난 뭔가를 찾고 있지만 그게 뭔지 잘 몰라요. 하지만 그것을 아는 건 분명히 내게 무척 중요해요.


우리들 중 누구는 아편에서 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신에게서 찾고, 누구는 위스키에서, 누구는 사랑에서 그걸 찾죠. 모두 같은 길이면서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아요.


끔찍하리만큼 분하지만 당시의 그녀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사건이었기에 지나치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었다. 뼈저린 회개가 아닌 잊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마도 그녀 안의 우둔함을 탓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삶은 그들이 기꺼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지만 그들의 가슴속엔 언제나 욕망이, 오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이 가득하죠 그건 열망이자 갈망이에요. 영원한 삶으로 그들을 이끌어줄 죽음에 대한 열렬한 열망이요. 죽음이 진정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은 무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 혼돈 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관현악단의 각 단원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작은 역할에만 신경씁니다. 하지만 그들도 교향곡이 아름답다는 걸 압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들도 자신의 역할에 만족합니다.


내가 인간인 걸 모르나요? 불행하고 외로운 인간? 난 평안과 위로와 용기를 원해요. 오, 잠시라도 신에게서 눈을 돌려 내게 작은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순 없나요? 모든 고통 받는 것들에 대해 품는 기독교적인 연민 말고, 단지 나를 위한 인간적인 연민은 없나요?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분노가 그녀를 휩쌌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그녀는 중독될 지경이었다. 그 굴욕감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아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녀 앞에 탄탄대로로 쭉 뻗어 있는 듯 보였던 길이 이제는 복잡한 미로였고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고 미래에 대한 그림이 조금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수많은 어려움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전 끔찍이도 나약하지만 그때처럼 한심하고 비열한 여자는 아니에요. 제게 기회를 주실래요? 제가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기회를 주시지 않을래요? 오, 아버지, 전 몹시 외롭고 너무 비참해요. 아버지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해요.


나는 그 애가 거침없고 솔직하기를 바라요. 그 애가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독립된 인격체이길 바라고 자유로운 남자처럼 인생을 살면서 저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요.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모든 인간의 번뇌가 하찮게 쪼그라들었던 그때. 어느 날 아침 아직 어두운데 가마에 오른 것며 동이 터 올 때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눈이 아닌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순식간에 가슴속의 고통이 사그라졌던 기억. 굽이치는 자연을 뚫고 지나간 그 길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희미하나마 가늠할 수 있는 그녀 앞에 놓인 그 길을 따라간다면, 친절하고 익살맞은 늙은 워딩턴이 아무 곳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던 길이 아니라 수녀원의 친애하던 너무나 겸허히 따랐던 길, 평화로 이어지는 그 길을 간다면 말이다.



+ 옮긴이의 말


미국의 사회비평가 카밀 팔리아는 현대 여성은 사랑할 남자를 찾아 헤매면서도 남성에게 폭군이 되어야 할지 노예가 되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망설이는 강한 여성의 낭만적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현대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맡아 왔던 전형적인 여성상과 고정된 성역할에서 탈피하고 있으며 성인 여성의 삶과 동일시되었던 결혼 또한 그 의미가 유동적이고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랑과 결혼은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그리고 남성에게 더욱 까다롭고 어려운 숙제로 점점 진화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이 조심스럽게 제시한 인생에 대한 희망은 용서에 있지 않을까. 서머싯 몸은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인간의 양태를 고발하면서도 인간의 그러한 어리석음까지 사랑할 때 용서가 가능하고 비로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결말은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버지란 존재는 일반적으로 여자 아이의 일생에서 처음 만나는 남자다. 키티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애정과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돈 버는 기계에 불과했다. 키티는 원만한 관계 속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자랐다.


따라서 키티는 결혼을 독립된 남녀의 사랑과 상호보완적 관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머니가 그랬듯 남편을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 줄 제2의 아버지로 여겼다.


여성성은 헌신과 순종, 다산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유롭게 변신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드러운 강인함 또한 여성성의 일부다.


 

 남성과 여성, 성적 구분없이 인간이라는 말로 치환하였을 때에도 모두 마음을 울린다. 우리 모두 어리석고, 위선적이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때때로 헷갈렸던 기르고 돌보는 것에 대해 애정을 느끼는 내 안의 여성성에 대해서도 어딘지 모를 위로를 안기는 책. 하도 성별에 대해 뒤숭숭한 세상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성별과 관련된 책은 피해왔는데 이 책을 필사하며 아앗, 블로그에 올릴 순 없어 라고 멈칫멈칫거렸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보니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삶에 대한 예찬, 그러니까 헤르만 헤세의 책의 장르였다. 전쟁세대는 아무래도 이런 류의 책들이 많아서 마음이 뒤숭숭할 때 찾아 읽으면 평안을 준다. 

 불변의 진리인 완벽히 우리는 고독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구원을 바라선 안되며 오로지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건 종교, 철학 심지어는 과학까지 여러 분야에서 각기 다른 언어로 역설하고 있지만 사무치게 외로워지곤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나는 평생을 구원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습은 달랐을지라도 키티와 비슷했던 것이다. 이는 삶에 대한 집착의 한 종류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나를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도 치기어린 생각임을 배워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하염없이 흐를 뿐인 세상의 이치들에 눈을 감고 둥실둥실 떠가는 것이다. 때때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순간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우리 모두 어리석고 위선적이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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